【懐かしい洋公主の記憶】
洋公主の「洋」は、洋画・洋楽などで用いられる西洋を示す言葉だ。そして「公主」は、支那に由来するもので「天子の娘」「姫君」を表現。英語では「ヤンキー・プリンセス」と呼ばれることもある。
「洋公主論争」を伝えたのは、中共のタブロイド紙『環球時報』だった。なぜ米地方紙のコメ欄で起きた日鮮のやり取りをクローズアップしたのか不明だが、この支那由来の言葉に注目したのかも知れない。
参照:新華経済9月2日『従軍慰安婦は“洋公主”、日本のネットユーザー発言に在米韓国人が激怒―韓国メディ』
「洋公主=ヤンゴンジュ 양공주」とは、日本人有志が指摘した通り、米兵向けの売春婦で、他に「洋セクシ 양색시」「洋ガルボ 양갈보」とも呼ばれた。
これが差別的な表現と指摘される一方、昔の南鮮紙には「洋公主」の漢字が踊る。高齢の南鮮人には聞き慣れた言葉でもあったのだろう。これこそ捏造従軍慰安婦の謎を解くキーワードのひとつだ。
大東亜戦争の終結後、米軍は南鮮を支配下に置いた。駐屯する基地は、我が軍の司令部があった龍山(ヨンサン)や、滑走路が整った平沢(ピョンテク)など日本軍から奪い取ったものだった。
そして、米軍が駐屯する基地周辺に出現したのが洋公主だった。ドル目当てに集まった街娼がワラワラ登場したのではなく、日本時代にあった遊郭がベースになっていた模様だ。
慰安婦がそのまま洋公主(ヤンゴンジュ)に変わったのである。客が入れ替わっただけとも言える。そして洋公主は、朝鮮戦争を経て60~70年代にかけて更に数を増やしていった。
ソウルの北方でDMZにも近い東豆川(トンドゥチョン)基地。最近の画像でも淫靡なネオン街が確認できるが、60年代の調査では、この東豆川周辺だけで1万人に達する洋公主が居たという。
研究者によると南鮮政府は当時、洋公主の総数を1万6000人と推計していたが、これは未成年の女性を含まない数で、実態を反映していない。南鮮国内では累計で30万人という見方もある。
年配の南鮮人なら誰でも洋公主という言葉を聞いたことがあるに違いない。そして、捏造された慰安婦と違って「洋公主の活躍」を撮影したフィルムもしっかり残っている。
北朝鮮サッカーチームの映画で金正日に気に入られた英国のダニエル・ゴードン監督が制作した北3部作の完結作品。それが本邦未公開の「クロッシング・ザ・ライン」だった。
ベトナム戦争中、ソ連亡命を企てて38度線を越えた米兵ジェームズ・ドレスノクの波乱人生を描いた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だ。そこに実物の洋公主が登場していた…
米軍施設のゲート前に立つ女性。これが歴史真実の洋公主の姿である。ゲートには不鮮明だが「レクリエーション・センター」と記されている。慰安所と変わらない米軍娯楽施設だ。
ゲートを潜ると、そこは怪しい店が立ち並び、米兵が正に闊歩する別世界。行き交う米兵に媚を売る洋公主たちの姿もバッチリ撮影されている。BBC所蔵のニュース映像が映画で使われたのである。
戦後の我が国に開設されたRAAと似ているが、南鮮の基地周辺にあるのは、大歓楽街だ。更に、RAAが批判を受けて半年で閉鎖された経緯とは異なり、南鮮の米軍歓楽街は歴史を重ねて今に至っている。
南鮮の米軍慰安婦に関しては橋下騒動の最中の5月に『米韓が作った兵士慰安街』と題して触れた。NYタイムズ紙の告発報道を手掛かりにした記事だが、そこで過去を語る南鮮女こそ典型的な洋公主だった。
蔑称である「洋公主」というワードがメディアに登場するのは稀で、大方は「慰安婦」に置き替えられてた。ややこしい。ちなみに「洋公主」の朝鮮語版Wikipediaで引用される資料も表現は「慰安婦」だ。
UN軍を相手にする慰安婦の登録実施を伝える記事で、出典もハッキリ判った。1961年9月14日付の東亜日報である。訪南経験の多い加瀬英明氏によると、こうした記事や広告は珍しくないという。
「日韓国交樹立の前年に、韓国をジャーナリストとして訪れてから、足繁く通ったが、『東亜日報』をはじめとする韓国の主要新聞に、米軍のための「慰安婦」を募集する広告を良く目にした」
概ね洋公主=慰安婦なのだが、旧時代の慰安婦と南鮮の洋公主には大きな違いがあった。南鮮政府が、洋公主の管理に深く関与していたのである。
しかも、米軍向け売春システムを整備した人物が朴正煕だった。
1950年に朝鮮戦争が始まると、駐留米軍の急増にあわせて洋公主も膨れ上がった。記録によれば、激戦中の51年に釜山だけで慰安所の新設は74件にのぼっている。
洋公主の“活躍”は、朝鮮戦争が休戦しても終わらなかった。駐留兵士向け性産業が拡大する中、米軍は性病の蔓延に悩み始める。1957年にはOEC(米経済調整官室)も参加し、政府間協議が行なわれた。
米側の申し出によって南鮮政府は、社会保健部直轄の性病診察所を基地周辺に47ヵ所設置。洋公主を一定のエリアに隔離するなど国家による統制・管理を進めた。
米軍基地周辺の性病診察所付き隔離エリアは「基地村」と呼ばれ、東豆川やソウルに近い議政府(ウィジョンブ)は、急速に繁栄した。議政府は2002年に米兵の装甲車ひき逃げ惨事が起きた場所だ。
そして1961年、軍事クーデターで李承晩を追放した朴正煕は「基地村」の本格的な整備に乗り出した。朴正煕が制定した観光事業振興法は、ドルを稼ぐ洋公主を公式に認めるものだった。
この観光振興法は、売春を禁じた「淪落行為防止法」に抜け道をつくり、いわゆる「赤線地帯」に法的根拠を与えたのである。朴正煕は梨泰院(イテウォン)など全国36ヵ所の基地村を赤線地帯に指定した。
朴正煕は、セマウル(新しい村)運動の提唱で知られるが、それ以前に売春村を開発してたいたのだ。64年には米軍向け施設の売り上げは、900万ドルを超え、国家の外貨収入の10%に及んだという。
また70年代になると京畿地方だけで年間800万ドルの外貨が洋公主の収入になったという京畿道観光運輸課の公式調査も存在する。基地村は、南鮮経済を支える巨大売春産業であったのだ。
朴正煕は70年代に基地村浄化運動に取り組んだとされる。しかし、それは性病検査を徹底し、行政組織が洋公主の英会話教室を開くなど、性産業の発展に寄与するものだった。
朝鮮の伝統産業をシステム化した中興の祖が朴正煕である。この偉大な父親の“功績”を無視し、捏造慰安婦問題で我が国に因縁を付ける資格など、パククネにはないのだ。
吉見義明ら捏造派は、慰安婦の軍関与も、強制的な連行も立証できなかった。そこで今時は、慰安婦が「施設に監禁され、奴隷状態にあった」と非難する。すなわち、性奴隷だ。
それが実際どのような状態なのか…解き明かしてくれるのも洋公主だ。洋公主は、性病を発症すると「モンキーハウス」と呼ばれる窓に鉄格子が付いた監禁施設に押し込まれる。
これは、NYT紙で告発した南鮮女も明かしている事実だ。そして、基地村問題の研究者によると、罹病した洋公主は抗生物質が過剰投与され、突然死するケースが多かったという。
一方、リクルートに関しては捏造慰安婦も裸足で逃げ出すレベルだ。初期の段階では、北朝鮮シンパと見なした女性を連行したり、北の女性ゲリラを拉致して売り飛ばすこともあったと伝えられる。
敵軍兵を捕らえて娼婦に仕立てるのだ。ジュネーブ条約を持ち出して議論している場合ではない。南鮮で流布される捏造慰安婦の“悲劇”よりも醜悪。完全にアウトだ。
洋公主の物語は、慰安婦捏造ストーリーの元ネタであることは確実だが、歴史の表舞台に突然登場した時期も極めて近い。80年代、南鮮で反米・反軍政ムードが高まる中、基地村の問題が浮上した。
親北左派の連中が、反米闘争の新テーマとして提起したのである。その過程で90年代初頭、挺身隊を意図的に歪曲した“従軍慰安婦”がクローズアップされる。
その流れか、我が国の左派系組織やフェミ系団体が基地村問題を指摘するケースも目立つ。韓国軍慰安婦の公的資料を発掘したのも、南鮮のフェミニスト女性学者だった。
【語り始めた基地村の洋公主】
「固定式慰安所-特殊慰安隊」
そうした記述が、1956年に韓国陸軍本部が編纂した公文書『後方戦史(人事編)』に残っていた。実績統計として、4ヵ所89人の慰安婦が1年間で20万回以上の“慰安”を行なったと記されている。
http://www.asahi.com/national/update/0223/028.html">参照:朝日新聞アーカイブ『朝鮮戦争時の韓国軍にも慰安婦制度 韓国の研究者発表』
河野洋平の顔面に叩き付けたくなるような資料だが、加瀬英明氏によると約10年前、研究発表に慌てた南鮮政府は、国防部資料室の韓国軍慰安婦資料を閲覧禁止にしたという。
確かに青瓦台にとって致命的な歴史資料。特に陸軍将校だった朴正煕の娘は言い逃れできない。しかし資料を隠蔽しても「洋公主」の存在は、NJ州のマラソン主催者が受け答えたように一般に知られている…
南鮮国内に米兵向け慰安婦がウヨウヨいたことを知りながら我が国を罵倒する精神構造は異常だ。日本時代の慰安婦が「20世紀最大の人権侵害」で、洋公主については「ノーコメント」など許されない。
捏造慰安婦が第三国の地方都市でスパークする一方、洋公主は歴史の陰でひっそりした印象だ。実在の洋公主は、海外巡業に励むこともなく、実名で告発を始めたのも最近である。
自称慰安婦が適当なウソを並べるのと違い、まだ証言も少なく資料は封印…学術的な研究も滞りがちだ。しかし、証拠写真どころか活動中の映像まで残っている。反日陣営を攻撃する恰好の歴史事実だ。
しかも洋公主の相手は朝鮮戦争・ベトナム戦争世代に遡る米兵だ。グレンデールなどでやりたい放題の在米朝鮮人に鉄槌を下し、米国務省を怯ませることも出来る。
慰安婦捏造派の妄言に反論することも重要だが、洋公主や韓国軍慰安婦をキーワードに真正面から反撃する姿勢も欠かせない。
知られざる洋公主の実像は、捏造慰安婦の壮大なウソを暴く可能性を秘めている。
【그리운 양공주의 기억 】
양공주의「양」는, 양화・서양 음악등에서 이용되는 서양을 나타내는 말이다.그리고「공주」는, 시나에 유래하는 것으로「천자의 딸(아가씨)」「희군」를 표현.영어에서는「양키・프린세스」로 불리기도 한다.
「양공주 논쟁」를 전한 것은, 중공의 타블로이드지『환구 시보』였다.왜 요네즈치방지의 쌀란에서 일어난 일선의 교환을 클로즈 업 했는지 불명하지만, 이 시나 유래의 말에 주목했을지도 모르다.
▼실재하는 양공주와 미국 병사(한겨레)
참조:신화경제 9월 2일『종군위안부는“양공주”, 일본의 넷 유저 발언에 재미 한국인이 격노―한국 메디 』
「양공주=얀곤쥬 양공주」와는, 일본인 유시가 지적한 대로, 미국 병사 전용의 매춘부로, 그 밖에「양sexy 양색시」「양가르보 양갈보」라고도 불렸다.
이것이 차별적인 표현이라고 지적되는 한편, 옛 남선지에는「양공주」의 한자가 춤춘다.고령의 남선인에는 귀에 익은 말이라도 있었을 것이다.이것이야말로 날조 종군위안부의 수수께끼를 푸는 키워드의 하나다.
▼남선지의「양공주」기사(연대 미상)
대동아전쟁의 종결후, 미군은 남선을 지배하에 두었다.주둔 하는 기지는, 우리 군의 사령부가 있던 용산(욘산)이나, 활주로가 갖추어진 히라사와(폴테크) 등 일본군으로부터 강탈한 것이었다.
그리고, 미군이 주둔 하는 기지 주변에 출현했던 것이 양공주였다.달러 목적에 모인 가창이 짚 짚 등장한 것은 아니고, 일본 시대에 있던 유곽이 베이스가 되어 있던 모양이다.
위안부가 그대로 양공주(얀곤쥬)로 바뀌었던 것이다.손님이 바뀌었을 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그리고 양공주는, 한국 전쟁을 거쳐 60~70년대에 걸쳐 더욱 수를 늘려 갔다.
▼동두천의 미국 병사를 위한 환락가
서울의 북방에서 DMZ에도 가까운 동두천(톤두톨) 기지.최근의 화상에서도 음미인 네온거리를 확인할 수 있지만, 60년대의 조사에서는, 이 동두천주변에서만 1만명에 이르는 양공주가 있었다고 한다.
연구자에 의하면 남선정부는 당시 , 양공주의 총수를 1만 6000명으로 추계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미성년의 여성을 포함하지 않는 수로, 실태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남선국내에서는 누계로 30만명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연배의 남선인이라면 누구라도 양공주라는 말을 (들)물었던 적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그리고, 날조 된 위안부와 달리「양공주의 활약」를 촬영한 필름도 확실히 남아 있다.
【실록 필름안의 양공주 】
북한 축구 팀의 영화로 김정일에 마음에 든 영국의 다니엘・고든 감독이 제작한 북쪽 3부작의 완결 작품.그것이 본방미공개의「크로싱・더・라인」였다.
베트남 전쟁중, 소련 망명을 기획해 38 도선을 넘은 미국 병사 제임스・드레스노크의 파란 인생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거기에 실물의 양공주가 등장하고 있던 …
▼미 시설 게이트전에 서는 여자(BBC)
미군 시설의 게이트전에 서는 여성.이것이 역사 진실의 양공주의 모습이다.게이트에는 불선명하지만「레크리에이션・센터」라고 기록되고 있다.위안소와 변함없는 미군 오락시설이다.
게이트를 기어들면, 거기는 이상한 가게가 나란히 서, 미국 병사가 정말로 활보 하는 별세계.왕래하는 미국 병사에게 아양을 파는 양공주들의 모습도 밧치리 촬영되고 있다.BBC 소장의 뉴스 영상이 영화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미국 병사를 유혹하는 양공주 3인조(BBC)
전후의 우리 나라에 개설된 RAA와 닮아 있지만, 남선의 기지 주변에 있는 것은, 대환락가다.또한, RAA가 비판을 받아 반년에 폐쇄된 경위와는 달라, 남선의 미군 환락가는 역사를 거듭해 지금 도달하고 있다.
남선의 미군 위안부에 관해서는 교하 소동의 한중간의 5월에『한미가 만든 병사 위안거리』라고 제목을 붙여서 접했다.NY타임지의 고발 보도를 실마리로 한 기사이지만, 거기서 과거를 말하는 남선녀야말로 전형적인 양공주였다.
▼양공주 시대를 말하는 남선녀 09년 1월(NYT지)
멸칭인「양공주」라고 하는 워드가 미디어에 등장하는 것은 드물고, 대부분은「위안부」에 바꿔 놓을 수 있었다.까다롭다.덧붙여서「양공주」의 조선어판 Wikipedia로 인용되는 자료도 표현은「위안부」다.
▼UN군의 위안부 모집 기사(동아일보)
UN군을 상대로 하는 위안부의 등록 실시를 전하는 기사로, 출전도 분명하게 알았다.1961년 9월 14 일자의 동아일보이다.방남 경험이 많은 카세 히데아키씨에 의하면, 이러한 기사나 광고는 드물지 않다고 한다.
「일한 국교 수립의 전년에, 한국을 져널리스트로서 방문하고 나서, 다리 끓임없게 다녔지만,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하는 한국의 주요 신문에, 미군을 위한「위안부」를 모집하는 광고를 잘 본 」
대체로 양공주=위안부지만, 구시대의 위안부와 남선의 양공주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남선정부가, 양공주의 관리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선으로 매춘하는 미국 병사(BBC)
게다가, 미군을 위한 매춘 시스템을 정비한 인물이 박정희였다.
【박정희가 만든 공창 지역 지대 】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시작되면, 주둔 미군의 급증에 맞추어 양공주도 부풀어 올랐다.기록에 의하면, 격전중의 51년에 부산에서만 위안소의 신설은 74건에 달하고 있다.
양공주의“활약”는, 한국 전쟁이 휴전해도 끝나지 않았다.주둔 병사를 위한 성 산업이 확대하는 중, 미군은 성병의 만연에 고민하기 시작한다.1957년에는 OEC(미 경제 조정관실)도 참가해, 정부간협의가 행해졌다.
▼매춘 시설에 모이는 미국 병사(BBC)
미국측의 제의(신청)에 의해서 남선정부는, 사회 보건부 직할의 성병 진찰소를 기지 주변에 47개소 설치.양공주를 일정한 에리어에 격리하는 등 국가에 의한 통제・관리를 진행시켰다.
미군 기지 주변의 성병 진찰소 첨부 격리 에리어는「기지마을」로 불려 동두천이나 서울에 가까운 의정부(위젼브)는, 급속히 번영했다.의정부는 2002년에 미국 병사의 장갑차 뺑소니 참사가 일어난 장소다.
그리고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이승만을 추방한 박정희는「기지마을」의 본격적인 정비에 나섰다.박정희가 제정한 관광사업 진흥법은, 달러를 버는 양공주를 공식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기지마을의 양공주 1959년경(한겨레)
이 관광 진흥법은, 매춘을 금지한「윤락 행위 방지법」에 샛길을 만들어, 이른바 「공창 지역 지대」에 법적 근거를 주었던 것이다.박정희는 이태원(이태원) 등 전국 36개소의 기지마을을 공창 지역 지대로 지정했다.
박정희는, 세마울(새로운 마을) 운동의 제창으로 알려지지만, 그 이전에 매춘마을을 개발있었던 것이다.64년에는 미군을 위한 시설의 매상은, 900만 달러를 넘어 국가의 외화수입의 10%에 이르렀다고 한다.
▼쿠데타 직후의 박정희등
또 70년대가 되면 경기 지방에서만 연간 800만 달러의 외화가 양공주의 수입이 되었다고 하는 경기도 관광 운수과의 공식 조사도 존재한다.기지마을은, 남선경제를 지지하는 거대 매춘 산업이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70년대에 기지마을 정화 운동에 맞붙었다고 여겨진다.그러나, 그것은 성병 검사를 철저히 해, 행정 조직이 양공주의 영어회화 교실을 여는 등, 성 산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남선국가 매춘의 아버지・박정희
조선의 전통 산업을 시스템화한 중흥의 선조가 박정희이다.이 위대한 부친의“공적”를 무시해, 날조 위안부 문제로 우리 나라에 생트집을 잡는 자격 등, 파크크네에는 없는 것이다.
【적여성병을 생포로 창녀에 …】
요시미 요시아키등 날조파는, 위안부의 군관여도, 강제적인 연행도 입증할 수 없었다.거기서 요즈음은, 위안부가「시설에 감금되어 노예 상태에 있던」와 비난 한다.즉, 성 노예다.
그것이 실제 어떠한 상태인가…해명해 주는 것도 양공주다.양공주는, 성병을 발병하면「멍키 하우스」로 불리는 창에 철격자가 붙은 감금 시설에 밀어넣어진다.
▼귀중한 기지마을 보도 77년 6월(매일 경제)
이것은, NYT지로 고발한 남선녀도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그리고, 기지마을 문제의 연구자에 의하면, 이병한 양공주는 항생 물질이 과잉 투여되어 돌연사 하는 케이스가 많았다고 한다.
한편, 리크루트에 관해서는 날조 위안부도 맨발로 도망가는 레벨이다.초기의 단계에서는, 북한 sympathizer라고 본 여성을 연행하거나 북쪽의 여성 게릴라를 납치해 팔아 치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UN군에 구속된 키타 간호사(file)
적군병을 잡고 창녀로 키운다.제네바 조약을 꺼내 논의하고 있을 때는 아니다.남선으로 유포되는 날조 위안부의“비극”보다 추악.완전하게 아웃이다.
양공주의 이야기는, 위안부 날조 스토리의 원재료인 것은 확실하지만, 역사의 정식 무대에 돌연 등장했던 시기도 지극히 가깝다.80년대, 남선으로 반미・반군정무드가 높아지는 중, 기지마을의 문제가 부상했다.
▼기지마을 활보 하는 미국 병사와 양공주 95년(동아일보)
친북 좌파의 무리가, 반미 투쟁의 신테마로서 제기했던 것이다.그 과정에서 90년대 초두, 정신대를 의도적으로 왜곡한“종군위안부”가 클로즈 업 된다.
그 흐름인가, 우리 나라의 좌파계 조직이나 페미계 단체가 기지마을 문제를 지적하는 케이스도 눈에 띈다.한국군 위안부의 공적 자료를 발굴했던 것도, 남선의 feminist 여성학자였다.
【말하기 시작한 기지마을의 양공주 】
「고정식 위안소-특수 위안대 」
그러한 기술이, 1956년에 한국 육군 본부가 편찬 한 공문서『후방 전사(인사편)』에 남아 있었다.실적 통계로서 4개소 89명의 위안부가 1년간에 20만회 이상의“위안”를 행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참조:아사히 신문 어카이브(archive)『한국 전쟁시의 한국군에게도 위안부 제도 한국의 연구자 발표 』
코노 요헤이의 안면에 내던지고 싶어지는 자료이지만, 카세 히데아키씨에 의하면 약 10년전, 연구 발표에 당황한 남선정부는, 국방부 자료실의 한국군 위안부 자료를 열람 금지로 했다고 한다.
▼치 가게앞에 줄선 양공주(LIFE잡지)
확실히 청와대에 있어서 치명적인 역사 자료.특히 육군 장교였던 박정희의 딸(아가씨)는 발뺌해 할 수 없다.그러나 자료를 은폐 해도「양공주」의 존재는, NJ주의 마라톤 주최자가 대답같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
남선국내에 미국 병사를 위한 위안부가 우요우요 있던 것을 알면서 우리 나라를 매도하는 정신 구조는 비정상이다.일본 시대의 위안부가「20 세기 최대의 인권침해」로, 양공주에 대해서는「노 코멘트」 등 용서되지 않는다.
▼물색중의 미국 병사와 양공주(LIFE잡지)
날조 위안부가 제3국의 지방도시로 스파크 하는 한편, 양공주는 역사의 그늘에서 고요히 한 인상이다.실재의 양공주는, 해외 순회공연에 힘쓸 것도 없고, 실명으로 고발을 시작했던 것도 최근이다.
▼작년 7월 국역판 출판『기지마을의 여자들 』
자칭 위안부가 적당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과 달라, 아직 증언도 적게 자료는 봉인…학술적인 연구도 막히기 쉽상이다.그러나, 증거 사진은 커녕 활동중의 영상까지 남아 있다.반일 진영을 공격하는 모양의 역사 사실이다.
게다가 양공주의 상대는 한국 전쟁・베트남 전쟁 세대에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 병사다.그렌데이르등에서 제멋대로의 재미 한국인에 철퇴를 내려, 미국무성을 기가 죽게 할 수도 있다.
▼미국 병사와 노는 양공주(BBC)
위안부 날조파의 망언에 반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양공주나 한국군 위안부를 키워드에 바로 정면으로부터 반격 하는 자세도 빠뜨릴 수 없다.
알려지지 않은 양공주의 실상은, 날조 위안부의 장대한 거짓말을 폭로할 가능성을 은밀한이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