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とよとみ ひでよし)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사후(死後)에 그 뜻을 이은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다.
그의 출생에 관한 많은 기록 중에 尾張國(おはりのくに)의 나카무라(中村)라는 곳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히데요시(秀吉)는 낮은 신분에다 가난하게 태어난 사실에 항상 열등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천하를 손에 넣은 후에도 유달리 「자신은 훌륭한 신분의 태생임」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猿(さる)·원숭이」 혹은 「小猿(こざる)」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150cm 남짓의 단신인데다 말년에는 상당히 살이 찌는 등 그의 열등감은 이러한 외모에서 연유했던 것 같다. 18세 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수하로 들어간 히데요시(秀吉)는 자신의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다른 출세욕을 불태웠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밝은 성격과 뛰어난 기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노부나가(信長)가 미츠히데(光秀)에게 배신을 당한 「本能寺(ほんのうじ)の變(へん)」은 히데요시에게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히데요시(秀吉)는 즉각 毛利(もうり)氏와 강화를 맺고 미츠히데(光秀)를 꺾어 주군의 원수를 갚는 충성을 보인다. 3년 후에 かんぱく(關白·헤이안 시대 이후 일왕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았던 최고위의 대신)의 위치에 오르고, 다시 5년 후에 천하를 통일하여 명실공히 일본 제일의 실력자가 된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사후에 히데요시의 행동거지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노부나가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만만치 않았는데,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姬)를 이에야스의 아내로 들여보내고, 또 자신의 어머니 오만도코로(大政所)를 이에야스에게 인사 보내는 등 회유정책을 써서 이에야스에게는 「히데요시가 자신에게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만족감에 젖게 하는 한편, 「이에야스는 나의 신하」임을 공공연히 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의 아제치성(安土城)을 모델로 히데요시가 축조한 것이 오사카성(大阪城)이다. 2년여에 걸쳐 완공된 오사카성의 호화로움을 보고 당시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히데요시는 이 오사카성을 자신의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더욱 철저하게 檢地(けんち·토지측량, 검사)와 刀狩(かたなが)り를 실시했다. 刀狩り란 일반 백성이 刀(칼)·脇差(わきざ)し(큰 칼에 곁들여 허리에 차는 작은 칼)·弓(활)·槍(창)·鐵砲(てっぽう·대포) 같은 것을 소유할 수 없도록 한 것인데, 이를 위반한 자들에 대한 처벌 또한 극도로 엄격했다. 이는 일반 농민과 무사들의 구분을 확실히 하여 반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한 방침이었다.
천하무적으로 보이던 히데요시도 정한론(征韓論) 등 대륙 진출의 실패로 치명적인 세력 약화를 초래하여 결국 1598년에 노쇠한 몸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とよとみ ひでよし)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사후(死後)에 그 뜻을 이은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다. 그의 출생에 관한 많은 기록 중에 尾張國(おはりのくに)의 나카무라(中村)라는 곳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히데요시(秀吉)는 낮은 신분에다 가난하게 태어난 사실에 항상 열등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천하를 손에 넣은 후에도 유달리 「자신은 훌륭한 신분의 태생임」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猿(さる)·원숭이」 혹은 「小猿(こざる)」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150cm 남짓의 단신인데다 말년에는 상당히 살이 찌는 등 그의 열등감은 이러한 외모에서 연유했던 것 같다. 18세 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수하로 들어간 히데요시(秀吉)는 자신의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다른 출세욕을 불태웠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밝은 성격과 뛰어난 기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노부나가(信長)가 미츠히데(光秀)에게 배신을 당한 「本能寺(ほんのうじ)の變(へん)」은 히데요시에게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히데요시(秀吉)는 즉각 毛利(もうり)氏와 강화를 맺고 미츠히데(光秀)를 꺾어 주군의 원수를 갚는 충성을 보인다. 3년 후에 かんぱく(關白·헤이안 시대 이후 일왕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았던 최고위의 대신)의 위치에 오르고, 다시 5년 후에 천하를 통일하여 명실공히 일본 제일의 실력자가 된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사후에 히데요시의 행동거지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노부나가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만만치 않았는데,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姬)를 이에야스의 아내로 들여보내고, 또 자신의 어머니 오만도코로(大政所)를 이에야스에게 인사 보내는 등 회유정책을 써서 이에야스에게는 「히데요시가 자신에게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만족감에 젖게 하는 한편, 「이에야스는 나의 신하」임을 공공연히 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의 아제치성(安土城)을 모델로 히데요시가 축조한 것이 오사카성(大阪城)이다. 2년여에 걸쳐 완공된 오사카성의 호화로움을 보고 당시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히데요시는 이 오사카성을 자신의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더욱 철저하게 檢地(けんち·토지측량, 검사)와 刀狩(かたなが)り를 실시했다. 刀狩り란 일반 백성이 刀(칼)·脇差(わきざ)し(큰 칼에 곁들여 허리에 차는 작은 칼)·弓(활)·槍(창)·鐵砲(てっぽう·대포) 같은 것을 소유할 수 없도록 한 것인데, 이를 위반한 자들에 대한 처벌 또한 극도로 엄격했다. 이는 일반 농민과 무사들의 구분을 확실히 하여 반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한 방침이었다. 천하무적으로 보이던 히데요시도 정한론(征韓論) 등 대륙 진출의 실패로 치명적인 세력 약화를 초래하여 결국 1598년에 노쇠한 몸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