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종류의 기계적인 악기가 과거 몇 세기의 발전을 후퇴시켰다. 시계태엽 뮤직박스와 사람이 없이 쳐지는 피아노등은 당대를 18세기로 돌려놓는 시대에 뒤진 것들이었다. 발명가 자끄 보깐송(Jacque Vaucanson)는, 사실은 진짜 악기들의 연주하는 모습을 연구했고 자주 기계적인 도안으로 뮤직박스를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어느 것도 창조적인 음악의 생산하게 하지 못했다 인더스트리얼 음악은 테입 레코딩Tape Recording과 같은 20세기의 다른 기술적인 발전에 준하여 전자악기의 사용의 범위에 많은 부분 의지한다. 70년대 말까지는 학구적인 작곡의 범위에서 사용되던 것이 대중적인 아티스트들에 의해서, 그러나 락에 기반한 아티스트들이 예외적으로 드물게 이 기술의 잠재력을 정말로 연구하기 위해 조금 시도해고자하였다. 많은 팝 밴드들에게, 테입과 전자 필터들을 깊이와 공간감의 환상을 제공하고, 그들의 음을 깔끔하게 하며,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그들 의 음악의 가장 가벼운 부분을 통하여 매우 뻔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을 허락하였 다. 키보드가 사용되었던 부분은 피아노나 올갠이 사용되는 것처럼 사용되었다. 90년대에 들어오자 이 기술은 많은 팝과 락의 핵심이 되었지만, 70년대에는 오로지 덥(Dub) 프로듀서나 독일의 프로그레시브-스페이스 락밴드Cosmic Band나 브라이언 에노와 같은 개척자들만이 보다 손에 넣기 쉬운 음악을 위해 초기의 진보주의자들 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음의 제작을 위한 전자기술의 사용은 적어도 1873년, C.G. Page박사가 공표한 그의 ”전기음악”(자석편자와 나선형 동철사에 의해 소리의 울림을 낳는 방법)에 대한 우연한 발견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에는 어쨌든 아무도 그 현상을 현실적인 악기로 사용하는데 성공적으로 응용하지 못했다. 최초의 진정한 전자 악기는 1974년에 발견된 엘리샤 그레이Elisha Gray의 뮤지컬 텔레그라프 “musical telegragh” (다성적인 두 개의 옥타브의 전자올갠)이고 이에 많은 다른 것들-예를 들자면 윌리엄 듀들 William Duddell가 1899년에 발표한 ”씽잉 아크singing arc” 나 1900년에 발표된 X두스 카힐Thaddeus Cahill의 텔레하모늄 telharmonium등-이 뒤따랐다.이 뒤늦은 악기들은 지독하게 복잡한 도안을 가지고있었고, 60피트의 길이에 200톤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텔레하모늄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공학적 기반은 후에 1929년에 만들어진 하몬드 올갠Harmond Organ에 이용되었다. 리 드 포레스트Lee De Forest의 열전도관의 발전을 따라 상업적인 전자악기는 발전했고, 데어민The Theremin, 온데스 마르테놋 The Ondes Martenot, 스페어폰 The Spharophon 그리고 트로토늄 The Trautonium과 같은 악기들의 발전은 1920년대 에 들어서야 가능했다.에드가 바레즈Edgas Varese나 다리우스 미요 Darius Milh명, 그리고 올리버 메시앙Oliver Messiaen과 같은 실험적인 작곡가들은 이러한 악기들 을 음악적 어휘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고 작곡을 했지만 그들은 약간 만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대신 이러한 악기들은 음악관 퍼포먼스에서 그런 악기들 이 다른 오케스트라의 악기처럼 사용되어지는 것이 특별한 구경거리가 됨으로써 보다 대중에게 유명해졌다. 1931년 레오 테레민Leo Theremin이 미국인 작곡가 헨리 카웰(Henry Cowell)을 위해 제작한 특수한 키보드인 리드미콘(rhythmicon)은 시퀀? 로서 최초의 것으로써 반복되는 부분을 녹음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나온 코렐의 ”새로운 음악적 자원(New Musical Resource)”이라는 책에서 그가 찾아낸 새로운 피아노에 기반한 음향과, 톤의 모음, 그리고 피아노처럼 치는 것으로 만든 효과들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1942년 존 케이지는 미래에 대해 예언하길 ”많은 뮤지션들이 청취할 수 있는 음과 소음을 갖고있고 작곡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소형의 기술적인 상자를 바란 다.” 그러한 뮤지션들 중의 하나인 에드가 바레즈 또한 말한다.”나는 나의 개인적 인 생각들을 표현하기 위해, 정확하고 새로운 표현 방법을 원하고 있습니다. 음향기계요.” 바레즈의 이러한 역사적인 언급에서 그가 앞서 말한 노트와 하모니의 조각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나 오로지 소리의 구조의 형태만이 필요로 하는 음악 적 성취때문에 비록 그가 단순히 구체음악만를 고려한 것일지라도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초기 역사에서의 사상적인 음악면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작곡가들은 2차 대전 직전에 아주 잠깐동안 이 새로운 기술의 잠재력을 시험해 보고자했다. 중대한 사건은 테이프 레코더의 발명이었다. 덴마크인 발명가인 발덴 마르 포울센(Valdemar Poulsen)에 의해 1898년에 최초의 마그네틱 녹음기는 만들어 졌다. 그의 도안은 피아노 철사줄의 코일을 마그네틱 패턴으로 대체한 자석을 이용한 마이크로폰(그 자체는 1876년 벨의 전화의 발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을 사용한 것이었다. 쇠를 사용한 녹음기는 산화자철로 입힌 플라스틱 테입을 독일에 서 만들어지고 난 1935년에 만들어졌고 전쟁이 끝나서야 상업적인 도안이 나타났 으며 그 발명이 새로운 음악을 위해 사용될 가능성은 명백한 것이었다. 구체음악 은 1948년, 프랑스인 엔지니어인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가 고안한 것이 었다. 그의 첫 작품인 이동성있는 증기의 녹음을 사용한 ”에뛰드 오 셰흐밍 드 파 (Etude aux chemins de fer)”에서 그는 미래주의자들의 현대 산업에 대한 강박관념 에 관한 주제에 관심을 가졌고 아마도 언제나 인더스트리얼 음악이라는 단어가 잘못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이 일은 테입보다는 녹음기를 많이 사용한 것이었지만 서로 다른 녹음들을 재배치하고 그 속도를 바꾸며 그루브를 변화시키고 녹음된 것들을 뒤집어 트는 것이었다.(에드가 바레즈나 다리우스 미요 폴 힌드미스 (Paul Hindemiths)와 존 케이지등은 이미 이것이 녹음되기 전에 속도를 변화시키는 녹음을 시도해보았다.)) 1950년 ”드 씸폰느 뿌에 엥 옴므 수엘(the Symphonie pour un homme seul)”이 끝나고 피에르 헨리(Pierre Henry)와 함께 다시금 녹음기를 이용 하였으며 기계적이거나 자연적인 음향의 녹음되기 전의 음악을 더 많은 복잡 하고 강력한 시도를 말하는 목소리를 함께 사용하여 나타냈다. 전자기기를 음향을 만들어내는데 사용함에 있어, 그 기술은 장려되는 많은 음악 적 혁명들을 포함하였다. 처음에, 교육받은 많은 작곡자들의 손에서 전자기기는 과거에는 음악적으로는 쓸모없던 음향에의 접근을 제공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음향들의 과거의 전통적인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통해 표현될 수 없는 방면으 로 시대를 넘어선 발전을 허락하였다. 결국, 음악적으로 교육받지 않은 자들에서 음악의 제작이 기원을 둔다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가치를 가진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악기를 다루는 것은 연습하거나 악보를 읽는 것을 배우는 것은 소용이 없다 언젠가는 어쨌건 진보주의적 클래식이 아닌 뮤지션들이 구체음악이 발견해 낸 테이프 레코딩 안에서 타고난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을 시작할 것이었다. 독일의 에서는, 헤르베르트 아이에르트(Herbert Eimert), 로베르트 바이어(Robert Beyer)그리고 베르너 마이어-에플러(Werner Meyer-Eppler)은 북서독의 라디오 스튜 디오(Northwest Germen Radio studio)에서 전자음악을 위한 스튜디오를 발견해 냈 다. 그들의 악기기계사용법은 원시적이었고 오로지 1953년에나 스튜디오를 방문한 칼하이츠 슈톡하우젠에 의해 창조적으로 재사용되었다. 그들의 전자음악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최초의 낯?텝음악가들은 오로지 전자음에 의해 발생되는 소리를 응축하려했지만 그 와중에 인습적인 기악법과 전자음향과 기술적 인 테입 레코딩간의 장벽이 무너져버렸고 슈톡하우젠의 “Gesang der Junglinge (1956) 나 바레즈의 ”뽀엠 일렉트로니끄(Poeme Electronique)”(1958)와 같은 결과 를 낳았다. 50년대를 지나면서 초기의 신서사이져는 발전되었다. 특히, RCA신서사이져는 비록 그게 미국인 작곡가인 밀톤 바비트(Milton Babbitt) ((50년대 전반을 통하여 유럽의 움직임은 존 케이지, 오토 루엥(Otto Luening), 블라디미르 워셔스키(Vladimir Ussachevsky), 고든 머마 그리고 로버트 애쉴리 (Robert Ashley)등의 작곡가들에 의해 미국과 병행하였다.)) 에 의해 사용된 것이 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이었다. 60년대 말의 무그(Moog)와 부칼(Buchla) 신서사 이져는 새로운 기술과 테크닉을 그들 방식의 음악으로 적용 하고자하는 클래식 영역의 바깥의 음악가들을 포용하면서 보다 융통성 있고, 들고다니기 좋으며, 덜 비싼 악기의 방향으로 계속 발전하였다. 비록 초기의 많은 전자음악들이 청중 들이 분개하고 난폭해지는 반응을 얻긴 했지만 60년대는 점진적인 대중성의 변화가 보인다. 유명한 거기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사건들은, 루이스, 베베 바론(Luise, Bebe Baron 부부의 전자음악 영화 O.S.T인 ”금지된 행성(Forbidden Planet(1955))” 프랭크 자파의 ”프레이크 아웃(FreakOut (1966))”, 비틀즈(The Beatles)의 ”리볼버 (Revolver (1966))”와 ”서젼 페퍼스 론리 하트 클럽 밴드(Sergeant Pepper"s Lonel Hearts Club Band (1967))”, 그리고 월터 카를로스(Walter Carlos)의 ”스위치드 온 바흐(Switched On Bach (1968))”을 들 수 있다. 진보적인 음악적 전통 은 테크닉과 음악이 만들어지는 종류에 있어서의 기간에서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원리이다. 어떠한 5,60년대나 70년대의 인더스트리얼 음악에 접근한 조비에 프랑스(Zoviet France), 해플러 트리오(The Hafler Trio), P16D4, 크라니오클라스트(Cranioclast), 스트레이프 에프 알(Strafe F.R)혹은 NWW들은 전자음악이나 구체음악 뮤지션들은 실험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테크닉(전자 신서 사이져나 프로세싱, 테입 매니플레이션)의 독창성이 아니라 관념적이고 자연스러운 음을 사용하여 1958년부터 구체음악가 혹은 작곡가로서 활동한 룩 페라리(Luc Ferrari)는 다른 비슷한 작곡과들과는 동떨어지게 마음에 안 드는 자연스러운 음들 을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연상작용을 자극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이야기가 있는 드라마의 같은 종류의 것을 만들었다. ”쁘띠 심뽄느 푸 엥 뻬사쥐 드 쁘린템뜨(Petite symphonie pour un paysage de printemps(1973))”나 ”헤떼로지 고뜨(Heterozygote(1964))”등의 작업은 해플러 트리오가 20년 후에 만든 것과 오해 할수있을만큼 비슷한 작업들을 했다. 페라리의 중요한 초기의 ”비싸쥐 브이(Visage V(1959))”는 미래주의자들의 인더스트리얼 음향에 대한 취향에 공헌했으며 이는 (미래주의자들의 인더스트리얼 음향에 대한 취향은) 또한 필립 카슨(Phillpe Carson)의 불협화음인 ”튜맥(Turmac(1962))”,그리고 루이지 노노(Luigi Nono)의 정치적으로 반항적인 습작인 ”라 파브리카 일루미나타(La fabbrica illuminata (1964))”에서 사용하였다. 페라리의 작업은 특히 인상적인데, 왜냐하면 그는 구체 음악이 새로운 근본은 아방가르드 음악은 음악가가 아닌 아마추어들에게 달려있는 것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아차린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의 의도는 많은 사람들이 바캉스를 가서 스냅사진을 찍어오듯 음악을 만들도록 아마 추어 구체음악가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비슷하게도 구체음악가들 중 다작을 하는 작곡가인 버나드 파르메지아니(Bernard Parmegiani)는 관념적인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과 공동으로 공헌했다. - 그가 정규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어린시절의 피아노 레슨같은 것과는 다른)뿐만 아니라 그가 악보와 기술적인 디테일을 테입음악의 즉흥적인 접근하여 직관적으로 채용한 결과였다. ”라 타블르 드 마띠에르(La table des matieres(1979))” 그리고 ”드 내츄라 소노룸(De Natura Sonorum(1975))” 와 같은 그의 작업은 점진적으로 하나의 음의 텍스쳐를 다른 텍스쳐로의 변환을 꾀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죠비에 프랑스, P.G.R. 혹은 존 워터맨(John Watermann)같은 인더스트리얼 그룹들의 지지를 받 았다. 전자음악가와 구체음악가들은 예술 음악안에서의 악보의 우선성을 깨고자했다. 엘슨버그가 썼듯이, ”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음악을 만들기를 원하는 것을 상상 해보라. 화가는 구성된 점과 수많은 색깔들을 나열하여 작품을 만들고자 하고, 우리는 점과 색깔들간의 연계를 통해 여러 가지로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작곡가 하고싶어하는 것이다.” 후에 잘 보여졌듯이, 페루치오 바수니는 최초로 채보를 벗어난 클래식 작곡가였고, 그같은 자유를 위한 에드가 바레즈의 열망은 테입 음악이 나타나기까지 그의 위대한 좌절의 이유가 되었다. 1950년대의 시작 으로 고전적인 진보주의(클래시컬 아방가르드)는 화가와 같이 음악을 만드는 자유 를 누리기 시작했다. 즉각적으로 인더스트리얼 음악가들은 비록 아방가르드의 전통 을 알아차린 많은 경우 보다 더 락 음악의 변방에 빚을 졌는데, 저명한 탠저린 드림 (Tangerine Dream)이나 크라프트베르크같은 그룹들은 중요한 작곡가들의 사용하기 쉬운 리듬안에서 관심을 가진 새로운 음향의 매력을 결합시켰다. 영국에서는 인더스트 리얼 음악의 고향이라는 이름과 안 어울리게도 락의 변두리에 있는 락커들이 보다 더 인습적인 라인업을 강화하는데 전자악기들을 사용(호크윈드(Hawkwind)나 비틀즈를 그 예로 들 수 있을것이다.))하거나 클래식의 웅장함을 복제하는 방법(Yes, ELP가 대표적) 으로 사용하는 듯 했다. 70년대 초반의 영국은 클래식의 언어에서 벗어나 조금 더 영리하게, 새 기술이 만들어내는 음악이 어떤 새로운 종류의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가졌다.
다른 곳으로, 미국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프랭크 자파의 아방가르드 현대음악적 지식은 그가 락음악에 대해 가진 것보다 깊었고, ”더 크롬 플레이티드 오브 데스티 니(The Chrome Plated Megaphone of Destiny)와 전자적믹싱과 테입(maniforlation) 을 이끌었다. USA(United State of America)같은 다른 사이키델릭 밴드들도 전자악 기와 아방가르드 테크닉을 시도했다. 레지던트같이, 1970년대 초에 활동을 시작하 였을 당시의 음악은 인습적인 취향과 질, 생각을 무시하고 습격하는 것이었고 테입 테크놀로지(써드 레친롤(Third Reich"N"Roll)과 같은 앨범에서는 60년대의 팝의 전 형적인 꼴라지는 매우 조잡한 것이었다.)) 사용하여 시대를 앞서가는 팝 샘플링 논 의뿐만 아니라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작업을 들려준다. 1968년 실버 애플(Silv er Apple)이라는 뉴욕의 듀오는 단순하고 기계와도 같은 전자진동을 사이키델릭 팝 과 캔(Can) 이전에서 유래하는 리듬으로 다른 후대의 밴드들에게 암암리에 영향을 미쳤다. 만약 당신이 크라프트베르크 이전의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흔적을 찾다보면 실버 애플이 자주 무시당하는 진정한 선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탠저린 드림, 파우스트, 노이(Neu), 클러스터(Cluster), 클라우스 슐 츠 그리고 캔(아무도 이러한 수준의 명성을 누리지 못하던)과 같은 예술가들은 락 에 기반하지않은 실험((다른 지역의 그룹들로는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나 락시 뮤직(Roxymusic)이 보다 더 주의를 끌었다)) 의 시작을 알리듯 보다 싼 새로운 전 자악기를 사용하였지만 음악은 매우 중요한 작곡가들의 아이디어를 훔친 것으로 여 전히 일반 대중을 겨냥한 것이다. 캔의 호거 크즈카이(Holger czukay)는 어떻게 기 술이 엘리트와 일반 대중을 교차하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본이다. 슈톡하우젠아래에서 공부한 뒤, 크즈카이와 일민 슈미트(Ilmin schmit)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락세계에 투입했고 크즈카이의 초기의 테입 꼴라지 실험은 카낙시스 (Canaxis)앨범에서 들을 수 있다. 탠저린 드림이나 클러스터와 같은 그 사상적인 명확성과 음조를 추종하는 밴드들은 노이즈, 무조주의와 혼란을 발전시킨 음악을 만들었다. 파우스트는 한 트랙이 아닌 앨범 전체에서 모든 새로운 테크놀러지를 사용하였 으며, 매우 능란하게 노이즈, 꼴라지와 락 리듬등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총체적인 탐험과 실험의 자유에 대한 자세를 설명해주었다. 비록 많은 최근의 그룹 들이 가장 유명한 그룹중의 하나인 캔을 인용하지만 파우스트와 그 밖의 밴드들은 ”실험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만 그 뜻은 기술을 숙달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는 것 을 설명해줌으로써 보다 중요한 영향력을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에게 미쳤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 기술을 스타일러스하게 반영하는 음악적 취향은 TG의 첫 앨범이 제작되던 무렵에 발표된 두 장의 고전적인 앨범 ”라디오 액티비티”와 ”트랜스 유럽 익스프레스(Trans Europe Express)”을 통? 나타났다. 이 두 장의 앨범은 전자발진기가 가장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반복되 는 소리들을 지루하지 않게 투명하고도 아름답게 만들어냈다. 사회에 깊숙히 뿌리 내린 그 발전을 반영할 수 있는 적절한 거울을 확립하는 것을 초창기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은 그들의 작품안에서 핵심적인 요소중의 하나인 리듬감있는 전자음악으로 보았다. 크라프트베르크는 환경에 대하여 포괄적인 비판적인 반감을 소재로 하는 일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초창기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은 크라프트베르크처럼 그들 의 환경을 반영하고자 했다. 놀랍게도 독일의 70년대 전반을 통해, 아스무스 티엣첸(Asmus Tietchens)와 같은 보다 대중적인 지지를 얻은 아방가르드 그룹과 아방가르드 작곡가들은 비슷한 영역 을 연구한 흔적을 남긴다. 그는 1965년부터 그러한 전자음악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는 아니었다. 그가 간단하게 보다 신서사이져에 기반한 영역 에 도달하자, 그는 다양한 사회적인 인정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그의 무조주의 구제음악을 작곡하길 멈추고 메자보(Merzbow)나 알케인 디바이스(Arcane Device)같 은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과 공동작업을 했다. 이러한 티엣첸의 자세는, 열성적인 아마추어와 거물급 작곡가사이의 차별대우가 추상적인 전자음악과 테입 음반의 영 역에서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마 ?인더스트리얼 음악이 영원히 가지는 중대한 의미는 그 장르가 시대를 초월한 차별의 파괴를 함에서 인정받을 것이다. 영국에서 아마도 인더스트리얼 음악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뮤지션의 가장 그와 대조적인 미학은 가진 브라이언 이노였다. 이노의 시대에 예술 가 지망생들은 그를 라멘트 영이나 필립 그래스(Phillipe Grass)와 같은 아방가르? 뮤지션으로 소개했고, 그는 이러한 영향력을 락시 뮤직의 초기 음악에서, 그리고 그의 음악등의 락음악에서 기꺼이 드러냈다.(예를 들면,로버트 프립(Robert Fripp) 과 함께한 노 푸지푸팅(No Pussyfooting) 음반은 기본적으로 기타음을 기반으로 편곡한 폴린 올리버(Pauline Oliver)의 전자음악곡의 파트IV중 I였다)인더스트리얼 뮤지션의 생성에 있어서 그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스튜디오의 사용에 전념했다 는 것이며, 그가 그라는 음악가가 아닌 존재가 많은 정식 음악적 훈련받지 않은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에게 이를 시도해보도록 영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BBC 라디오 워크샵의 존재, 슈톡하우젠이 사용했던 노쓰웨스트 저먼 라디오 스튜디오(Northwest German Radio studio)와 같은 영국의 많은 재단 휘하의 일렉트 로닉 스튜디오들이나 콜럼비아 프린스톤 전자음악 센터 (Columbia Princeton electronic music center)같은 곳이 매우 중요하다. 아방가르드 작고가들의 관념적 인 모험을 위한 설비를 조건으로 만들어진 초기의 스튜디오와는 달리, 그 라디오 워크샵은 사운드 트랙이나 라디오나 TV의 효과음을 만들어내는 보다 단순한 역할을 가졌고, 그 결과고 거기서 생산된 전자음악작품들은 보다 사회적으로 널리 들려지 는 것이었다. , 사회가 외계의 이미지와 전자음향을 얽히게 하기 어려움은 찾아내 었지만, 전자음악과 SF 엔터테인먼트간의 연합처럼 라디오포닉 워크샵은 잠재력 있는 미래의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은 전자음악의 가능성을 잘 알아차렸고 확실한 것으로 했다. 이런 흐름은 인더스트리얼 음악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록밴드 와이어(Wire)의 브루스 길버트(Bruce Gilbert)와 그레이엄 루이스(Grhama Luise)는 인더스트리얼 음악이나 음악가들의 영향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인더스트리얼 음악가들에세는 한계를 넘으려는 의지가 부족했다. 그들의 작품 ”둠Doom”(그리고 다른 작품들에서도)는 음악적인 면보다 문화적인 면에서 흥미있는 작품이 되었다. 비슷한 이유로, 한계를 뀌어넘으려는 본능이 모자라건 어쨌건 브라 이언 이노의 테크닉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전자음악적인 “Cosmic(혹은 스페이스락)
음악가들의 배타적인 또한 인더스트리얼이 만들어낸 영향력에 의한 것으로 구분되 어지는 꽤 대중적인 얼마간의 밴드들 또한 중요하다. 데펑트(Defunkt), 도나 썸머 와 조르지오 모로더(Donna Summer & Giorgio Moroder),칙(Chic) 그리고 제임스 브 라운(James Brown)등 Funk와 Disco를 경유한 뮤지션들은 모두 소울에서 영향받지 않은 댄스 음악인 CV, 클럭 DVAClock DVA, 23스키두23 skidoo, 훌라(Hulla)등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초기의 인더스트리얼 그룹들의 Funk가 없는 엄격함에서 영감을 얻은 최근의 인더스트리얼 댄스들의 멋대로 돌출되고 잘 만들어지지 않은 댄스음악에 실망하기 쉬울 것이다. 음악의 기술적 혁명이 진실로 느껴질만큼 뚜렷 해지기까지 30년이 걸렸다. 이것은 새로운 기술이 처음에는 설비(Establishmentgk smsep)서 그리고 그 뒤에는 록음악과 같은 좀 더 관습적인 음악가들의 손에서 발전 하였기 때문이다. Funk가 나타났을 때, 혁명적이기보다는 논의대상이었다. 재즈, 레게 그리고 다른 장르들은 이미 그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Funk 이데올로기인 ”독립”을 소개했었고, 수련받거나 기타를 만져보거나 듣지 못한 사람들을 참작해야 한다는 펑크(Funk)의 모든 요구를 위해, 기본적인 코드를 배우는 능력에는 여전히 의지했다. 그러나 테입 레코딩과 일렉트로닉스는 멀리 보다 근본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다양한 종류의 기계적인 악기가 과거 몇 세기의 발전을 후퇴시켰다. 시계태엽 뮤직박스와 사람이 없이 쳐지는 피아노등은 당대를 18세기로 돌려놓는 시대에 뒤진 것들이었다. 발명가 자끄 보깐송(Jacque Vaucanson)는, 사실은 진짜 악기들의 연주하는 모습을 연구했고 자주 기계적인 도안으로 뮤직박스를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어느 것도 창조적인 음악의 생산하게 하지 못했다 인더스트리얼 음악은 테입 레코딩Tape Recording과 같은 20세기의 다른 기술적인 발전에 준하여 전자악기의 사용의 범위에 많은 부분 의지한다. 70년대 말까지는 학구적인 작곡의 범위에서 사용되던 것이 대중적인 아티스트들에 의해서, 그러나 락에 기반한 아티스트들이 예외적으로 드물게 이 기술의 잠재력을 정말로 연구하기 위해 조금 시도해고자하였다. 많은 팝 밴드들에게, 테입과 전자 필터들을 깊이와 공간감의 환상을 제공하고, 그들의 음을 깔끔하게 하며,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그들 의 음악의 가장 가벼운 부분을 통하여 매우 뻔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을 허락하였 다. 키보드가 사용되었던 부분은 피아노나 올갠이 사용되는 것처럼 사용되었다. 90년대에 들어오자 이 기술은 많은 팝과 락의 핵심이 되었지만, 70년대에는 오로지 덥(Dub) 프로듀서나 독일의 프로그레시브-스페이스 락밴드Cosmic Band나 브라이언 에노와 같은 개척자들만이 보다 손에 넣기 쉬운 음악을 위해 초기의 진보주의자들 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음의 제작을 위한 전자기술의 사용은 적어도 1873년, C.G. Page박사가 공표한 그의 "전기음악"(자석편자와 나선형 동철사에 의해 소리의 울림을 낳는 방법)에 대한 우연한 발견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에는 어쨌든 아무도 그 현상을 현실적인 악기로 사용하는데 성공적으로 응용하지 못했다. 최초의 진정한 전자 악기는 1974년에 발견된 엘리샤 그레이Elisha Gray의 뮤지컬 텔레그라프 "musical telegragh" (다성적인 두 개의 옥타브의 전자올갠)이고 이에 많은 다른 것들-예를 들자면 윌리엄 듀들 William Duddell가 1899년에 발표한 "씽잉 아크singing arc" 나 1900년에 발표된 X두스 카힐Thaddeus Cahill의 텔레하모늄 telharmonium등-이 뒤따랐다.이 뒤늦은 악기들은 지독하게 복잡한 도안을 가지고있었고, 60피트의 길이에 200톤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텔레하모늄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공학적 기반은 후에 1929년에 만들어진 하몬드 올갠Harmond Organ에 이용되었다. 리 드 포레스트Lee De Forest의 열전도관의 발전을 따라 상업적인 전자악기는 발전했고, 데어민The Theremin, 온데스 마르테놋 The Ondes Martenot, 스페어폰 The Spharophon 그리고 트로토늄 The Trautonium과 같은 악기들의 발전은 1920년대 에 들어서야 가능했다.에드가 바레즈Edgas Varese나 다리우스 미요 Darius Milh명, 그리고 올리버 메시앙Oliver Messiaen과 같은 실험적인 작곡가들은 이러한 악기들 을 음악적 어휘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고 작곡을 했지만 그들은 약간 만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대신 이러한 악기들은 음악관 퍼포먼스에서 그런 악기들 이 다른 오케스트라의 악기처럼 사용되어지는 것이 특별한 구경거리가 됨으로써 보다 대중에게 유명해졌다. 1931년 레오 테레민Leo Theremin이 미국인 작곡가 헨리 카웰(Henry Cowell)을 위해 제작한 특수한 키보드인 리드미콘(rhythmicon)은 시퀀? 로서 최초의 것으로써 반복되는 부분을 녹음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나온 코렐의 "새로운 음악적 자원(New Musical Resource)"이라는 책에서 그가 찾아낸 새로운 피아노에 기반한 음향과, 톤의 모음, 그리고 피아노처럼 치는 것으로 만든 효과들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1942년 존 케이지는 미래에 대해 예언하길 "많은 뮤지션들이 청취할 수 있는 음과 소음을 갖고있고 작곡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소형의 기술적인 상자를 바란 다." 그러한 뮤지션들 중의 하나인 에드가 바레즈 또한 말한다."나는 나의 개인적 인 생각들을 표현하기 위해, 정확하고 새로운 표현 방법을 원하고 있습니다. 음향기계요." 바레즈의 이러한 역사적인 언급에서 그가 앞서 말한 노트와 하모니의 조각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나 오로지 소리의 구조의 형태만이 필요로 하는 음악 적 성취때문에 비록 그가 단순히 구체음악만를 고려한 것일지라도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초기 역사에서의 사상적인 음악면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작곡가들은 2차 대전 직전에 아주 잠깐동안 이 새로운 기술의 잠재력을 시험해 보고자했다. 중대한 사건은 테이프 레코더의 발명이었다. 덴마크인 발명가인 발덴 마르 포울센(Valdemar Poulsen)에 의해 1898년에 최초의 마그네틱 녹음기는 만들어 졌다. 그의 도안은 피아노 철사줄의 코일을 마그네틱 패턴으로 대체한 자석을 이용한 마이크로폰(그 자체는 1876년 벨의 전화의 발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을 사용한 것이었다. 쇠를 사용한 녹음기는 산화자철로 입힌 플라스틱 테입을 독일에 서 만들어지고 난 1935년에 만들어졌고 전쟁이 끝나서야 상업적인 도안이 나타났 으며 그 발명이 새로운 음악을 위해 사용될 가능성은 명백한 것이었다. 구체음악 은 1948년, 프랑스인 엔지니어인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가 고안한 것이 었다. 그의 첫 작품인 이동성있는 증기의 녹음을 사용한 "에뛰드 오 셰흐밍 드 파 (Etude aux chemins de fer)"에서 그는 미래주의자들의 현대 산업에 대한 강박관념 에 관한 주제에 관심을 가졌고 아마도 언제나 인더스트리얼 음악이라는 단어가 잘못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이 일은 테입보다는 녹음기를 많이 사용한 것이었지만 서로 다른 녹음들을 재배치하고 그 속도를 바꾸며 그루브를 변화시키고 녹음된 것들을 뒤집어 트는 것이었다.(에드가 바레즈나 다리우스 미요 폴 힌드미스 (Paul Hindemiths)와 존 케이지등은 이미 이것이 녹음되기 전에 속도를 변화시키는 녹음을 시도해보았다.)) 1950년 "드 씸폰느 뿌에 엥 옴므 수엘(the Symphonie pour un homme seul)"이 끝나고 피에르 헨리(Pierre Henry)와 함께 다시금 녹음기를 이용 하였으며 기계적이거나 자연적인 음향의 녹음되기 전의 음악을 더 많은 복잡 하고 강력한 시도를 말하는 목소리를 함께 사용하여 나타냈다. 전자기기를 음향을 만들어내는데 사용함에 있어, 그 기술은 장려되는 많은 음악 적 혁명들을 포함하였다. 처음에, 교육받은 많은 작곡자들의 손에서 전자기기는 과거에는 음악적으로는 쓸모없던 음향에의 접근을 제공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음향들의 과거의 전통적인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통해 표현될 수 없는 방면으 로 시대를 넘어선 발전을 허락하였다. 결국, 음악적으로 교육받지 않은 자들에서 음악의 제작이 기원을 둔다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가치를 가진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악기를 다루는 것은 연습하거나 악보를 읽는 것을 배우는 것은 소용이 없다 언젠가는 어쨌건 진보주의적 클래식이 아닌 뮤지션들이 구체음악이 발견해 낸 테이프 레코딩 안에서 타고난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을 시작할 것이었다. 독일의 에서는, 헤르베르트 아이에르트(Herbert Eimert), 로베르트 바이어(Robert Beyer)그리고 베르너 마이어-에플러(Werner Meyer-Eppler)은 북서독의 라디오 스튜 디오(Northwest Germen Radio studio)에서 전자음악을 위한 스튜디오를 발견해 냈 다. 그들의 악기기계사용법은 원시적이었고 오로지 1953년에나 스튜디오를 방문한 칼하이츠 슈톡하우젠에 의해 창조적으로 재사용되었다. 그들의 전자음악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최초의 낯?텝음악가들은 오로지 전자음에 의해 발생되는 소리를 응축하려했지만 그 와중에 인습적인 기악법과 전자음향과 기술적 인 테입 레코딩간의 장벽이 무너져버렸고 슈톡하우젠의 "Gesang der Junglinge (1956) 나 바레즈의 "뽀엠 일렉트로니끄(Poeme Electronique)"(1958)와 같은 결과 를 낳았다. 50년대를 지나면서 초기의 신서사이져는 발전되었다. 특히, RCA신서사이져는 비록 그게 미국인 작곡가인 밀톤 바비트(Milton Babbitt) ((50년대 전반을 통하여 유럽의 움직임은 존 케이지, 오토 루엥(Otto Luening), 블라디미르 워셔스키(Vladimir Ussachevsky), 고든 머마 그리고 로버트 애쉴리 (Robert Ashley)등의 작곡가들에 의해 미국과 병행하였다.)) 에 의해 사용된 것이 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이었다. 60년대 말의 무그(Moog)와 부칼(Buchla) 신서사 이져는 새로운 기술과 테크닉을 그들 방식의 음악으로 적용 하고자하는 클래식 영역의 바깥의 음악가들을 포용하면서 보다 융통성 있고, 들고다니기 좋으며, 덜 비싼 악기의 방향으로 계속 발전하였다. 비록 초기의 많은 전자음악들이 청중 들이 분개하고 난폭해지는 반응을 얻긴 했지만 60년대는 점진적인 대중성의 변화가 보인다. 유명한 거기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사건들은, 루이스, 베베 바론(Luise, Bebe Baron 부부의 전자음악 영화 O.S.T인 "금지된 행성(Forbidden Planet(1955))" 프랭크 자파의 "프레이크 아웃(FreakOut (1966))", 비틀즈(The Beatles)의 "리볼버 (Revolver (1966))"와 "서젼 페퍼스 론리 하트 클럽 밴드(Sergeant Pepper"s Lonel Hearts Club Band (1967))", 그리고 월터 카를로스(Walter Carlos)의 "스위치드 온 바흐(Switched On Bach (1968))"을 들 수 있다. 진보적인 음악적 전통 은 테크닉과 음악이 만들어지는 종류에 있어서의 기간에서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원리이다. 어떠한 5,60년대나 70년대의 인더스트리얼 음악에 접근한 조비에 프랑스(Zoviet France), 해플러 트리오(The Hafler Trio), P16D4, 크라니오클라스트(Cranioclast), 스트레이프 에프 알(Strafe F.R)혹은 NWW들은 전자음악이나 구체음악 뮤지션들은 실험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테크닉(전자 신서 사이져나 프로세싱, 테입 매니플레이션)의 독창성이 아니라 관념적이고 자연스러운 음을 사용하여 1958년부터 구체음악가 혹은 작곡가로서 활동한 룩 페라리(Luc Ferrari)는 다른 비슷한 작곡과들과는 동떨어지게 마음에 안 드는 자연스러운 음들 을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연상작용을 자극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이야기가 있는 드라마의 같은 종류의 것을 만들었다. "쁘띠 심뽄느 푸 엥 뻬사쥐 드 쁘린템뜨(Petite symphonie pour un paysage de printemps(1973))"나 "헤떼로지 고뜨(Heterozygote(1964))"등의 작업은 해플러 트리오가 20년 후에 만든 것과 오해 할수있을만큼 비슷한 작업들을 했다. 페라리의 중요한 초기의 "비싸쥐 브이(Visage V(1959))"는 미래주의자들의 인더스트리얼 음향에 대한 취향에 공헌했으며 이는 (미래주의자들의 인더스트리얼 음향에 대한 취향은) 또한 필립 카슨(Phillpe Carson)의 불협화음인 "튜맥(Turmac(1962))",그리고 루이지 노노(Luigi Nono)의 정치적으로 반항적인 습작인 "라 파브리카 일루미나타(La fabbrica illuminata (1964))"에서 사용하였다. 페라리의 작업은 특히 인상적인데, 왜냐하면 그는 구체 음악이 새로운 근본은 아방가르드 음악은 음악가가 아닌 아마추어들에게 달려있는 것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아차린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의 의도는 많은 사람들이 바캉스를 가서 스냅사진을 찍어오듯 음악을 만들도록 아마 추어 구체음악가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비슷하게도 구체음악가들 중 다작을 하는 작곡가인 버나드 파르메지아니(Bernard Parmegiani)는 관념적인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과 공동으로 공헌했다. - 그가 정규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어린시절의 피아노 레슨같은 것과는 다른)뿐만 아니라 그가 악보와 기술적인 디테일을 테입음악의 즉흥적인 접근하여 직관적으로 채용한 결과였다. "라 타블르 드 마띠에르(La table des matieres(1979))" 그리고 "드 내츄라 소노룸(De Natura Sonorum(1975))" 와 같은 그의 작업은 점진적으로 하나의 음의 텍스쳐를 다른 텍스쳐로의 변환을 꾀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죠비에 프랑스, P.G.R. 혹은 존 워터맨(John Watermann)같은 인더스트리얼 그룹들의 지지를 받 았다. 전자음악가와 구체음악가들은 예술 음악안에서의 악보의 우선성을 깨고자했다. 엘슨버그가 썼듯이, "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음악을 만들기를 원하는 것을 상상 해보라. 화가는 구성된 점과 수많은 색깔들을 나열하여 작품을 만들고자 하고, 우리는 점과 색깔들간의 연계를 통해 여러 가지로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작곡가 하고싶어하는 것이다." 후에 잘 보여졌듯이, 페루치오 바수니는 최초로 채보를 벗어난 클래식 작곡가였고, 그같은 자유를 위한 에드가 바레즈의 열망은 테입 음악이 나타나기까지 그의 위대한 좌절의 이유가 되었다. 1950년대의 시작 으로 고전적인 진보주의(클래시컬 아방가르드)는 화가와 같이 음악을 만드는 자유 를 누리기 시작했다. 즉각적으로 인더스트리얼 음악가들은 비록 아방가르드의 전통 을 알아차린 많은 경우 보다 더 락 음악의 변방에 빚을 졌는데, 저명한 탠저린 드림 (Tangerine Dream)이나 크라프트베르크같은 그룹들은 중요한 작곡가들의 사용하기 쉬운 리듬안에서 관심을 가진 새로운 음향의 매력을 결합시켰다. 영국에서는 인더스트 리얼 음악의 고향이라는 이름과 안 어울리게도 락의 변두리에 있는 락커들이 보다 더 인습적인 라인업을 강화하는데 전자악기들을 사용(호크윈드(Hawkwind)나 비틀즈를 그 예로 들 수 있을것이다.))하거나 클래식의 웅장함을 복제하는 방법(Yes, ELP가 대표적) 으로 사용하는 듯 했다. 70년대 초반의 영국은 클래식의 언어에서 벗어나 조금 더 영리하게, 새 기술이 만들어내는 음악이 어떤 새로운 종류의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가졌다. 다른 곳으로, 미국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프랭크 자파의 아방가르드 현대음악적 지식은 그가 락음악에 대해 가진 것보다 깊었고, "더 크롬 플레이티드 오브 데스티 니(The Chrome Plated Megaphone of Destiny)와 전자적믹싱과 테입(maniforlation) 을 이끌었다. USA(United State of America)같은 다른 사이키델릭 밴드들도 전자악 기와 아방가르드 테크닉을 시도했다. 레지던트같이, 1970년대 초에 활동을 시작하 였을 당시의 음악은 인습적인 취향과 질, 생각을 무시하고 습격하는 것이었고 테입 테크놀로지(써드 레친롤(Third Reich"N"Roll)과 같은 앨범에서는 60년대의 팝의 전 형적인 꼴라지는 매우 조잡한 것이었다.)) 사용하여 시대를 앞서가는 팝 샘플링 논 의뿐만 아니라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작업을 들려준다. 1968년 실버 애플(Silv er Apple)이라는 뉴욕의 듀오는 단순하고 기계와도 같은 전자진동을 사이키델릭 팝 과 캔(Can) 이전에서 유래하는 리듬으로 다른 후대의 밴드들에게 암암리에 영향을 미쳤다. 만약 당신이 크라프트베르크 이전의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흔적을 찾다보면 실버 애플이 자주 무시당하는 진정한 선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탠저린 드림, 파우스트, 노이(Neu), 클러스터(Cluster), 클라우스 슐 츠 그리고 캔(아무도 이러한 수준의 명성을 누리지 못하던)과 같은 예술가들은 락 에 기반하지않은 실험((다른 지역의 그룹들로는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나 락시 뮤직(Roxymusic)이 보다 더 주의를 끌었다)) 의 시작을 알리듯 보다 싼 새로운 전 자악기를 사용하였지만 음악은 매우 중요한 작곡가들의 아이디어를 훔친 것으로 여 전히 일반 대중을 겨냥한 것이다. 캔의 호거 크즈카이(Holger czukay)는 어떻게 기 술이 엘리트와 일반 대중을 교차하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본이다. 슈톡하우젠아래에서 공부한 뒤, 크즈카이와 일민 슈미트(Ilmin schmit)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락세계에 투입했고 크즈카이의 초기의 테입 꼴라지 실험은 카낙시스 (Canaxis)앨범에서 들을 수 있다. 탠저린 드림이나 클러스터와 같은 그 사상적인 명확성과 음조를 추종하는 밴드들은 노이즈, 무조주의와 혼란을 발전시킨 음악을 만들었다. 파우스트는 한 트랙이 아닌 앨범 전체에서 모든 새로운 테크놀러지를 사용하였 으며, 매우 능란하게 노이즈, 꼴라지와 락 리듬등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총체적인 탐험과 실험의 자유에 대한 자세를 설명해주었다. 비록 많은 최근의 그룹 들이 가장 유명한 그룹중의 하나인 캔을 인용하지만 파우스트와 그 밖의 밴드들은 "실험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만 그 뜻은 기술을 숙달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는 것 을 설명해줌으로써 보다 중요한 영향력을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에게 미쳤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 기술을 스타일러스하게 반영하는 음악적 취향은 TG의 첫 앨범이 제작되던 무렵에 발표된 두 장의 고전적인 앨범 "라디오 액티비티"와 "트랜스 유럽 익스프레스(Trans Europe Express)"을 통? 나타났다. 이 두 장의 앨범은 전자발진기가 가장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반복되 는 소리들을 지루하지 않게 투명하고도 아름답게 만들어냈다. 사회에 깊숙히 뿌리 내린 그 발전을 반영할 수 있는 적절한 거울을 확립하는 것을 초창기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은 그들의 작품안에서 핵심적인 요소중의 하나인 리듬감있는 전자음악으로 보았다. 크라프트베르크는 환경에 대하여 포괄적인 비판적인 반감을 소재로 하는 일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초창기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은 크라프트베르크처럼 그들 의 환경을 반영하고자 했다. 놀랍게도 독일의 70년대 전반을 통해, 아스무스 티엣첸(Asmus Tietchens)와 같은 보다 대중적인 지지를 얻은 아방가르드 그룹과 아방가르드 작곡가들은 비슷한 영역 을 연구한 흔적을 남긴다. 그는 1965년부터 그러한 전자음악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는 아니었다. 그가 간단하게 보다 신서사이져에 기반한 영역 에 도달하자, 그는 다양한 사회적인 인정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그의 무조주의 구제음악을 작곡하길 멈추고 메자보(Merzbow)나 알케인 디바이스(Arcane Device)같 은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과 공동작업을 했다. 이러한 티엣첸의 자세는, 열성적인 아마추어와 거물급 작곡가사이의 차별대우가 추상적인 전자음악과 테입 음반의 영 역에서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마 ?인더스트리얼 음악이 영원히 가지는 중대한 의미는 그 장르가 시대를 초월한 차별의 파괴를 함에서 인정받을 것이다. 영국에서 아마도 인더스트리얼 음악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뮤지션의 가장 그와 대조적인 미학은 가진 브라이언 이노였다. 이노의 시대에 예술 가 지망생들은 그를 라멘트 영이나 필립 그래스(Phillipe Grass)와 같은 아방가르? 뮤지션으로 소개했고, 그는 이러한 영향력을 락시 뮤직의 초기 음악에서, 그리고 그의 음악등의 락음악에서 기꺼이 드러냈다.(예를 들면,로버트 프립(Robert Fripp) 과 함께한 노 푸지푸팅(No Pussyfooting) 음반은 기본적으로 기타음을 기반으로 편곡한 폴린 올리버(Pauline Oliver)의 전자음악곡의 파트IV중 I였다)인더스트리얼 뮤지션의 생성에 있어서 그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스튜디오의 사용에 전념했다 는 것이며, 그가 그라는 음악가가 아닌 존재가 많은 정식 음악적 훈련받지 않은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에게 이를 시도해보도록 영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BBC 라디오 워크샵의 존재, 슈톡하우젠이 사용했던 노쓰웨스트 저먼 라디오 스튜디오(Northwest German Radio studio)와 같은 영국의 많은 재단 휘하의 일렉트 로닉 스튜디오들이나 콜럼비아 프린스톤 전자음악 센터 (Columbia Princeton electronic music center)같은 곳이 매우 중요하다. 아방가르드 작고가들의 관념적 인 모험을 위한 설비를 조건으로 만들어진 초기의 스튜디오와는 달리, 그 라디오 워크샵은 사운드 트랙이나 라디오나 TV의 효과음을 만들어내는 보다 단순한 역할을 가졌고, 그 결과고 거기서 생산된 전자음악작품들은 보다 사회적으로 널리 들려지 는 것이었다. , 사회가 외계의 이미지와 전자음향을 얽히게 하기 어려움은 찾아내 었지만, 전자음악과 SF 엔터테인먼트간의 연합처럼 라디오포닉 워크샵은 잠재력 있는 미래의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은 전자음악의 가능성을 잘 알아차렸고 확실한 것으로 했다. 이런

